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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 유산 BEST 2

by sweet spring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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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톤헨지

스톤헨지는 BC 3100년 무렵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공중에 걸쳐진 돌 구조물로, 선사시대의 중요한 기념물 중 하나입니다. 런던 고대 유물협회의 발굴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스톤헨지 건축은 크게 3기와 마지막 시기인 3단계로 구분 짓습니다. 1기에서는 원형 도랑과 구덩이로 구성된 기본 구조가 형성되었고, 2기에서는 통로를 확장하고 웨일스에서 온 화성암 기둥을 세웠습니다. 3-1기에서는 더 큰 돌과 삼 석탑을 추가하여 스톤헨지를 재구성하였으며, 3-2기와 3-3기에서는 구조물을 타원형에서 다시 원형과 말굽형으로 재배치한 것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이 같은 내용을 통해 스톤헨지의 발전과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스톤헨지는 특이한 구조로 알려져 있으며, 아틀란티스 후예들의 건축물로 주장되기도 합니다. 스톤헨지는 수백 년 전 색슨족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으며, 높이 4m에 무게가 25~30t에 달하는 거대한 돌을 원형으로 배열한 건석유구입니다. 이 구조는 돌기둥의 윗부분에 가로로 놓인 상인방 돌들로 특징지어지는데, 이 돌들은 곡선으로 잘려 원주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신전의 기둥과 유사한 불룩한 가운데 부분을 갖추고 있으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좁게 깎여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스톤헨지는 고인돌과 건축물의 특성을 동시에 갖춘 거석 유물로서 분류되기도 합니다. 17세기 초 제임스 1세는 스톤헨지를 조사하도록 건축가 조운즈에게 명령했고,  조운즈는 스톤헨지에서 로마식 설계양식과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식 기둥 배치를 확인하며, 이를 통해 고대 로마인이 스톤헨지를 건설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665년 존 오브리는 이를 드루이드 승려들의 성소로 설명했으나 이 주장은 신빙성을 잃었습니다. 과학적인 접근은 플린더스 피트리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그는 스톤헨지 돌을 측정하고 그 위치를 약도로 작성했으며, 돌이 태양의 특정 위치에 따라 배열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 주장은 학계에서 거부되었습니다. 스톤헨지는 상공에서 보면 손거울과 같은 모양을 하며, 중심으로 향하는 큰길이 아베뉴라 불립니다. 힐석재, 트리니 톤, 사르 센 원, Z구멍, Y구멍, 오브리 구멍, 주구의 순서로 배열됩니다. 1901년부터 노먼 로키어에 의해 체계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스톤헨지는 그리스와 이집트 사원의 천체 정렬을 연구한 로키어가 이집트 신전이 별의 배열에 맞춰 건축된 것으로 주장 발표했습니다. 로키어는 스톤헨지의 중심선과 태양의 첫 광선이 일직선을 이룬다는 것을 발표했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유적들의 기능은 세시 관측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또한 고대 인류가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사제계급이 존재했다고 주장했으나 이에 대한 반박도 있었습니다. 스톤헨지의 존재론은 초자연적인 힘이나 영적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되며, 순례지나 장례식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유물은 석기시대 초기에 건설되었으며, 그 정확한 목적과 의미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그 규모와 기술적인 정교함, 그리고 천문학적인 지식의 가능성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현재에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스톤헨지가 건설된 시기에는 그리스 동쪽 지역이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주석을 사용한 청동 도구 제작에 필요한 주석의 산지 중 하나가 영국 콘월반도였습니다. 그런 조건으로 이 지역은 상선들이 활발한 무역을 진행하던 곳이었기에 거석 건설 기술이 전해졌을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또한 스톤헨지 근처에는 300개 이상의 선사시대 분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사회 조직화의 필요성에 따라 지배계급이 건축물을 통해 사회를 결속시켰을 수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유럽의 거석 기념물 건설이 BC 1400년경 중지된 것은 미노아 문명의 붕괴와 '바다의 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영향이 있었습니다. 

스톤헨지의 구조는 천문학적인 관심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몇몇 돌은 태양이나 달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들이 천문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스톤헨지는 인류의 공동 유산으로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창의력과 노력의 결과물로서 그 가치가 주목받고 있음이며, 선사 시대의 기술과 문명 발전을 보여주는 유일무이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스톤헨지는 그들의 관찰과 관련된 문화적, 종교적 의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기여하고 있고, 과거의 문화와 종교적 신념, 그리고 천문학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톤헨지는 인간의 놀라운 노동과 기술력의 결합을 보여주는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거대한 돌을 옮기고 세우는 작업은 석기시대의 도구와 기술만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자원을 조직하고 협력하여 건축 프로젝트를 완수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증거입니다. 또한 그의 건축 양식은 선사 시대의 사회 구조와 생활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톤헨지가 인류의 역사와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식되었음에, 스톤헨지는 198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스톤헨지는 또한 관광지로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하여 선사 시대의 놀라운 건축물을 감상하며 선사 시대의 불가사의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스톤헨지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관광 산업을 통해 지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광은 지역 사회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따라서 스톤헨지는 현대 사회에도 많은 의미가 있으며,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의 대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2. 런던탑

런던탑(Tower of London ) 영국 런던의 템즈 강 북안에 있는 유서 깊은 궁전이자 성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국왕 폐하의 궁전이자 요새인 런던탑'입니다. 근세 초기까지 건설되어 영국의 역사와 문화 변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런던탑은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지었으며, 현재는 런던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유명한 세계 문화 유산이다.

 

탑이라기보다는 대단위 규모를 가진 하나의 궁의 모습이며, 궁극적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 런던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윌리엄 1세가 영국 전역에서 진행하고 있던 여러 성 건설 사업 일부이기도 했습니다. 노르만 왕조에 정복당한 앵글로색슨족의 반발을 막기 위한 성 축조 사업이었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런던탑이었습니다. 1078년에 노르만 왕 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한 정복자로서, 영국을 통치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군사시설을 건설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이유로 런던탑은 윌리업 정복자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런던탑은 테임즈 강에 가까운 높은 위치에 앵글로색슨 족의 도시인 런던을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가장 강력한 방어 시설을 건설하여 외부 침입을 막고 국왕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했으며, 초기에는 국왕의 궁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로써 런던탑은 왕실의 권력과 영국의 안전을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로 탄생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교도소, 군수창고, 군기지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런던탑은 왕이나 여왕이 머무르는 궁전보다는 무기고이자 군수창고, 죄수의 구금처”로 사용되었다며, 16세기 연대기 작가 래피얼 홀린 제드가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여러 번 다양한 용도로 바뀌어 쓰이면서 런던탑의 원래 모습을 유지한 건물은 웨이크 필드 타워와 토마스 타워뿐이 되어 안타까움이었습니다. 18세기에 영국 중세 시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고딕 복고 건축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1825년에 이르러서 화이트 타워 남쪽에 새롭게 기병 무기고가 고딕 복고 양식에 따라 건축되면서 런던탑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고, 런던탑을 포함한 다른 건물들을 워털루 배럭은 “15세기 고딕 성곽 양식”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초에 영국은 산업혁명과 열강의 경쟁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경제적 발전과 도시화가 이루어졌으며, 산업화에 따른 노동자 계급 구조의 변화와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했습니다. 또한, 제국주의의 확대와 군사적 활동으로 인해 영국은 해외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변화는 런던탑의 건축적 가치와 함께 영국의 역사적 상징물로써의 의미를 더욱 부각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런던탑은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국가 권력과 안전을 상징하는 상징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런던탑은 역사적 유적지로 방문객들에게 영국의 군사적 전통과 권력구조를 보여주는 기회의 장으로 현재는 영국을 방문하는 세계 관광객들의 인기 관광지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징적이고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8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인류의 대표 문화 유적으로서 앞으로도 영원히 그 가치를 빛낼 수 있는 런던탑이기를 기대하며, 이 또한  인류 공동의 책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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